HumanField
슬픈 암살·이상한 나라 / 이능표 본문
슬픈 암살·1
형체가 사라지고 빛이 가득한 어떤 곳으로 흘러갔다. 나는 액체이면서 기체이기도 한 무엇이고 생각이나 마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현상이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고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안다. 단지 그뿐, 모든 체계는 정지한다. 그런 시간이 잠시 흐르고 무언가 선택을 해야 했을 때 단지 있을 뿐인 그 있음에서 벗어나기로 하고 다시 살아 있음의 상태에 돌입한다. 모든 것이 분명하다. 확정된 사건만 존재할 뿐 생사의 경계란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죽음을 증언하는 것은 묘지와 해골뿐인데 나는 묘지가 없다. 공교롭게도 해골이 아니다. 화장실에 가서 물을 한 바가지 퍼부은 다음 거울을 들여다보자 그것이 거기 있다. 바로 나다. 두 개의 눈과 귀, 코와 입이 달린 어떤 현상. 그렇게 나는 다시 연결된다. 정해진 모양이 없는 어떤 모양의 통로 안으로 나를 밀어넣는다. 통로가 통로의 꼬리를 물고 말려 들어가는 우스꽝스런 모습이라니! 이런 짓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고 애써 눈을 부라린다. 다시, 살아 있음의 상태에 돌입한다. 철렁, 소리와 함께 나뭇잎이 떨어지다 빨랫줄에 내걸린다. 잉크 방울이 번지듯 “커피 드세요.” 그리고 암전. “출근하셔야죠.” 다시 암전. “안전운전의 길잡이!” 암전. “목적지를 설정하시겠습니까?” 암전. 뭔가 맛있는 걸 먹고 있었고, 자기가 뭘 먹고 있는지를 잠시 잊어버렸지만, 그러나 계속 먹으면서, 그게 맛있다는 걸 알고* 더 빨리 암전. 다시, 4월이 아니고 3월이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하며 내가 등장한다. 늘 그곳이다.
* 뭔가~알고 : 리차드 브라우티건, 《워터멜론 슈가에서》 중에서.
슬픈 암살·3
1.
나는 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안다. 자객은 도처에 있다.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을 잉태하지 않는 이종교배 시대의 전설적인 총잡이들. 스스로 정한 본질에 도달한, 만지고 맛보고 소화시키며 마침내 도달했다고 믿어버린, 반(反)문명으로 위장하거나 다차원으로 치장된 번식과 멸종에 관한 자학적 신상품들. 분노였거나 절망이었음이 분명한 자신의 피조물들을 기어코 살해하고야 마는 미안한 낯가림들. 뱃속에 에일리언을 잉태한 상투적 귀환……. 그렇게, 버젓이 바닥을 드러낸 미래가 나를 공중에 매다는 것이다. 발끝에는 나무의자가 받쳐지고, 모로 세워진 균형과, 실족을 유도하는 집착과, 무심코 지나친 절박한 근거들이, 인간의 말로 불리지 못한 절대적 상징에 대한 난처한 믿음들이, 아닌 밤중에 불쑥 자객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2.
결국 방아쇠를 당겼다. 양철지붕이 뚫리면서 은밀했던 삶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총알은 정수리를 통과한 다음 두 시 방향으로 날아갔다. 방안이 환해졌다. 그 전에 숨이 끊어졌다. 전설적인 암살자의 마지막 표적은 바로 자신이었다. 사람들이 몰려와 암살자의 시신을 운구해 가는 동안 꽃잎을 떨어뜨린 나무들이 잎사귀를 피우기 시작했다. 조종이 울리며 다른 날이 시작됐다. 종을 친 사람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불 꺼진 골목길에 암살자의 유령이 나타나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들이 그 뒤를 따라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아이들의 행방을 수소문하지 않았다.
3.
채널을 돌린다. 가까운 미래. 낯선 생물들이 행성을 장악한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다시, 채널을 돌린다. 주먹이 날아든다. 무릎을 꿇는다. 눈꺼풀이 가라앉는다. 더듬더듬. 리모컨을 찾아 버튼을 누른다. 턴 오프… 더 티브이※. 넥스트. 턴 오프…….
※ 턴 오프 더 티브이 : 넥스트(N.EX.T) 1집 <Home, 1992>에 수록된 곡이다.
눈부시다
어둠이 깔리는 강변에 습한 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고개를 꺾고 유령처럼 걸어가고 있다 그 옆에 문득 멈춰 섰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죽을 만큼 그리웠지만 그 또한 지나쳤으리라 언젠가 걷던 그 길을 다시 걷다 소름끼치는 낯섦이 엄습했고 강물에 잠긴 듯 불안에 떨었던 적이 있다, 그때 그 고요처럼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어디에 계절을 맞출까 마음을 다스릴 겨를도 없이 잎사귀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새들이 가지를 떠나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 하늘처럼
눈이 내렸다 검은 강물을 배경으로 불 켜진 도시가 불쑥 솟아오르자 낯익은 얼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며 유리 조각처럼 흩어져 날렸다 젖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죽고 싶어 나는 털썩 주저앉아 천천히 구두끈을 고쳐 맸다 그가 다시 절규했다 묻어버려 묻어버리란 말이야, 도착할 수 없는 목적지를 선택한 여행자처럼
달이 튀어 올랐다 젖은 허파를 통해 산소를 빨아들이며 숨이 트이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수초들은 강기슭 바위에 널려 물살을 타고 흐느적거렸다 강변의 연인들은 등을 구부리고 끌어안은 채 격렬하게 울어댔다 누군가 웃었다 박쥐들 같아 견딜 수 없이 차갑고 어두웠으므로 몸을 비틀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강물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비로소 눈부시다.
톡,
나는 너를 모른다 어느 곳에도 너에 관한 기록은 없다 어떤 절대적인 믿음, 추억에 대한 경외와 책임감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그리움으로부터 멀어진다, 폭풍 속으로
너는 사라졌다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밀밭 사이로 숨어들었다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살금살금 걸어와 등 뒤에서 깔깔댔지만 너는 여전히 4월의 폭풍과 그 밀밭 속에 있다, 너는 또
뱃머리에 앉아 있다 섬과 섬 사이의 길 위에서 연락선의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다 문득 너의 웃음소리에 파도가 부서졌다 너는 파랗게 웃었고 바다는 그때 빛을 잃고 잠시 고요했다 너는 그 파도 속에 있다, 너는 또
성냥갑 속에 있다 노을이 깔린 해변에서 우리는 말을 잃고 한동안 앉아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성냥을 긋자 너는 활활 불타올랐다 너는 그 불꽃 속에 있다, 너는 또
고래와 함께 있다 멍이 든 가슴을 안고 뜨거운 꿈길 속을 헤매다 파도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너는 바닷가 그 백사장에 있다 철없는 강아지들은 파도를 쫓고 그물에 걸린 어린 고래의 슬픈 눈망울을 바라보면서 촌로들은 혀를 찼다 쯧쯧 어쩌다 저 어린 것이… 쯧쯧 어쩌다 이 낯선 바다를 헤매고 있었던 것일까 너는 눈물을 흘렸다 너는 흘러내린 그 눈물 속에 있다 가엾은 어린 고래는 슬픈 울음을 울며 애원하듯 우리를 바라봤다 너는 그 눈망울 속에 있다, 너는 또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어느 곳에도 너에 관한 기록은 없다 가끔 불 꺼진 골목에 앉아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이름들을 호명했고 주소도 없이 그때 네가 왔다.
남행 南行
다시 남쪽 바다에 도착했다. 너는 또 아비의 병이 도진 것이라 하겠지만 어쩌겠느냐. 연전 청산도 어느 초분 앞에서, 진도 숨은 바다와 거제 몽돌 해변에서, 보길도 대숲과 임자도 소금밭에서, 도초 밀밭과 비진도 모래톱에서, 사량도 바위들과 남해 일몰 아래서 잠시 마주쳤으나 긴히 말을 붙여볼 틈도 없이 홀연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 서남쪽 바다 어디쯤에서 다시 만나지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어찌 장담하랴. 귀경을 할 때는 서쪽으로 길을 잡아 함평 인근을 거쳐 백수 해안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여기에는 전에 보아둔 어가가 한 채 있으니 한데서 밤을 새우는 일은 없으리라. 여수 먼 바다를 지키면서 연도 안도 금오도가 있고, 뱃머리를 틀어 북서쪽을 향하면 개도 백야도 낭도가 있다. 그 서남쪽 바다 저 멀리 나로도를 출발하여 손죽열도를 지나 평도 광도가 어디쯤일까 상심하다 수평선을 두어 개 더 지우고 나면 갑자기 눈앞을 막아서는 섬이 거문도다. 여수항을 버리고 내지를 돌아 서남쪽 바다의 모항인 목포에 도착하면 진도 추자도 거쳐 제주 가는 배, 안좌 가산 비금 도초 도목 흑산도로 해서 홍도 가는 배, 장산 마진 율도를 거쳐 저도에 닿는 배, 지도 지나 임자 거쳐 낙월도 가는 배, 고산 당시 욕지 자은도 여객선, 두루 사근 다수 오사동리 조도 가는 배, 그리고 벽파 어란 넙도 노화 보길 소안 모도 흑일 백일 청산 방면을 거쳐 완도에 닿는 배들이 모두 여기 있다. 남쪽 바다는 넓고 광활하여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으니 아비의 일을 더욱 허무하게 여김을 안다. 걱정하지 마라. 아비의 일이 그런 것이다. 단지 그러할 뿐이니 근심하지 마라.
― 이상 이능표 시집, 《슬픈 암살》, 2015, 북인

술래잡기
좀 더 살아야지. 산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말고, 좀 더 깊은 계곡으로 흘러 들어가 온전히 추워 봐야지.
술래여.
지독한 무관심으로 그대가 마침내 나를 찾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칡뿌리를 타고 내가 내린 곳은 영하 1도, 사면이 평지인 우리 집은 오늘도 정전이다. 며칠째 꿈이 들지 않는 밤길엔 잠의 긴 허리가 하늘하늘, 해바라기 씨앗이 툭 툭 터지는 소리에 내 하루의 모든 불빛은 꺼진다.
……산다는 것은 영상 1도의 온기, 언 손을 녹이고 바라보면 누구의 삶의 빙점에서 타오르는 불길인가? 가을 나무들 끝없이 끝없이 고개를 내민 저녁놀 속에 스물네 해째의 가을은 단풍잎 같은 창문을 내리고 있다.
춥다. 좀 더 살아야지.
해바라기 씨앗을 받아 겨울 동산에 뿌리고
봄이 오길 기다린다, 봄이 오면
내 사랑도 철들어 고백하지 않으랴. 안녕하세요. 당신을 사랑해요, 귓바퀴가 빠지도록. 처녀가 아니라 사내가 아니라 먼지 덮인 풀이라도 풀뿌리라도 살아만 있어 준다면.
그해 겨울
1
한밤 내 얼음장을 저어 강을 건넜다.
밤새도록 내 잠은 칼잠을 자고, 강기슭에 배를 깔고 불꿈을 꾸는 눈썹 위에 눈이 내렸다, 밤새도록.
2
산개할 것.
혼자서도 멀리 흩어져 사는 자여, 흩어질수록 가까이 모이는 만 갈래의 꿈, 밤새도록 내 잠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죽창 끝에 매달린 무수한 꿈을 흘리면서 지뢰지대를 지났다 무릎을 꿇고, 탐침을 쥔 손으로 자꾸만 헛것을 헤치며 모두들 팔목시계를 맞췄다 그해 겨울, 빛나는 단검 한 자루를 품고 8부 능선의 빙벽을 기어오르는 사내들의 완강한 뼈, 모든 차가운 것의 속에서 반짝이는 것은 무엇일까 깨진 무릎을 이끌고 우리들의 손은 굳게 소총을 쥐고 확신에 찬 노래를 부르고 빈틈없는 적의를 안심시킬 한마디 말도 지니지 않고 겨울을 넘겼다.
3
보초를 나갔다.
입초호 밑바닥에 배를 깔고 노래를 불렀다.
겨울나무의 껍질을 딛고 어둠 속을 질주하는 일개분대…… 목청을 잘린 채, 잠들지 않는 꿈속에서도 끊임없이 입 벌리는 그 살벌한 노래, 노래를.
거미
네 쌍의 다리와 두 개의 몸뚱이,
―몸뚱이는 대개 팥알을 닮았다.
쉽게 눈에 뜨이지 않고
전혀 상상 못 한 곳에서 문득 나타났다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든지.
사람 손에 쫓겨
멋쩍게 사라져버리곤 하는
―생각하기에 따라선 우습기 짝이 없는.
거미라는 종족.
잡으려 들면 죽은 듯 엎드리고
망에 걸려든 식사거리에 대해선 한없이 난폭한……
그리움도 결국
그런 것 아닐까?
이마에 휘감기는 거미줄을 떼어내면서
일하러 갈 때 더러 생각 들고
순진한 척 매달리면 모가지를 옭아매는.
꽃과 함께
해바라기 씨앗은 터지고
꽃잎은 저물고 나뭇잎이 지는 속도로 우리들은 떨어졌다.
하늘을 껴안고
강물은 죽음 같은 식욕을 빛내면서 언덕을 굽어 돌고
음악의
팔다리는 육교 건너 쇠약하게 걸어왔다.
취객들은 슬프게 취하고
소문 같은 풀벌레는 거미줄에 매달리고
혈관 속에서는 비늘이 돋아나고 물고기의 호흡을 흉내 내기도 했지만
세상은 살 만했고 더러는 화병에 꽂혀 있을 때만 자유롭게 피는
꽃과 함께 그러나 가을
강변도로를 무섭게 질주하는 자전거를 붙잡아 세우고 바람을 빼면서
도로관리국 직원은 욕설을 해댔다 씨발
죽고 싶어 죽고 싶단 말야 우리는
입 속으로만 지껄였다.
살 속에 씨를 박고 떨어졌지만 꽃 피는 봄날을 확신하진 않았으므로.
보리꽃
빈센트 반 고흐 풍의 여름이 왔으면
좋겠지?
고흐 풍의 하늘에는
찬밥 같은 혁명시 몇 편 묻었으면
좋겠지?
더러 여름 대신 겨울이 되돌아오고
그래서 더럭 겁이 날 때
시퍼런 보릿단에 묶여 실컷 매나 맞았으면
좋겠지?
거참 좋겠지?
봄이 오면 그런 생각.
꽃잎도 달지 않고,
울컥울컥 돋아나는 보리꽃.
― 이상 이능표 시집, 《이상한 나라》, 1988, 문학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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